[시민칼럼] 배제가 아닌 연대가 세상을 바꾼다

이선영 아나운서가 숙명여자대학교 후배에게

데스크 승인 2020.02.12 17:01 의견 0

숙명여자대학교, 나의 모교 후배들 중 일부는 트랜스젠더 A양의 입학을 반대하는 사유로 어렵게 일궈놓은 여성 권리의 전당에 A씨가 무임승차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 그리 생각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울시내 여자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들이 단체로 입학 반대 연서를 내서, 결국 A 학생이 입학 포기를 했을 때 우리 페미니즘의 지향이 어디있는가가 들춰진 느낌이었고, 참담했다. 우리 여성들이 사회에서 비로소 남성과 동일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그동안 남성이 독점적으로 누려왔다고 생각하는 우월적 지위를 여성이 ‘탈환’하는 것인가.

다소 동의하기 힘든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어떤 페미니스트들을 보며, 과거에 이런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이런식으로 단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단 한번도 약자적 지위에서 벗어나 본 적 없던 여성이 갑자기 우월적 지위를 주장한다고 해서 단박에 그리될 리도 없고, 과격하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이야기 할 때 그동안은 관심 밖이었던 여권에 대한 논의에 불이 붙는 것이 사실이라는 나름의 내적 타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비슷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어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두드러지는 이러한 경향을 묵과해온 것 같다. 그러다 이번 숙명여대 입학 포기 트랜스젠더 A양 사태를 두고 페이스북 피드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그동안 페미니즘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모른 채 했구나 그런 자책을 나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렵지만, 반대 의견으로서 존중한다는 전제를 두고 그래도 나는 트랜스젠더 A양의 입학 반대에 적극 동참한 후배들을 향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감히 내가 타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그래도 나는 그들을 ‘래디컬’ 혹은 ‘틀린’ 페미니즘이라 규정하고 배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당장에는 그저 스파크만 잔뜩 튀다 여기저기 화르르 불만 붙더라도. 우리가 진보해왔던 역사는 결국 배제가 아니라 연대의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겪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는 여성들이 오랫동안 겪어온 고통과 그 근원이 같다. 우리가 여성의 생물학적 신체적 특성을 스스로 선택했고, 그에 따라 여성으로 규정되어 살기를 동의하고 태어난 것이 아니듯, 트랜스젠더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도 그들의 정체성과 생물학적 특성이 불일치하도록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권 없이, 자유 의지와 무관하게 약자적 특성을 지니고 태어난 점에서 우리가 놓인 차별적 상황은 근본이 같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여성들이 분노해야 할 지점은, 변희수 하사와 A양이 굳이 수술대에 올라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 여성들에게, 자궁의 기능을 확인받아야만 비로소 여성성을 인정받고, 주민번호 뒷자리 2, 혹은 4를 부여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하면 어떤가. 혹은, 여성은 자궁이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출산을 해야하고, 만약 스스로의 의지로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는 반드시 자궁을 제거해야만 한다면 어떤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신체적 특성을 인증하지 않고도 나의 인격이 당연시 수용되는 사회라면, 그래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저 대등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면 누가 고통스럽게 수술을 하겠냐는 것이다.

토익 시험만 봐도 주민증을 검사한다. 병원에 가도, 동사무소에 가도, 편의점에서 맥주 한캔을 살 때도 우리는 매번 우리의 성별과 외관의 일치성을 확인받는다.

법, 제도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인프라는 다수 위주로 체계화된다. 그러므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집단은 자신들 위주로 형성된 법, 제도, 절차, 인식 그 모든 것이 특혜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 많은 부분 소수자인 우리 여성들조차, 많은 부분 나도 모르게 주류 집단에 속해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성별적 특성이 사회적으로 약자적 지위인 것은 맞지만, 오로지 여성들만이 약자로서의 지위를 독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급적 빨리 인정해야 한다. 다른 약자를 배제한 여성들만의 목소리는 단언컨대 결국 파묻힐 것이다.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여성의 이야기를 해본다. 남성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어쩌다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성은 만에 하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갖고 싶다면 출산 독박을 써야 한다. 신체적 고통은 물론이요, 직장에서 잘하던 프로젝트에서 빠지거나 호봉 누락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이후 육아에 있어서도 각종 사회적 부담이 비대칭적으로 여성에게 지워진다. 그래서 우리 여성들은, 인류 공동의 지향인 재생산의 의무를 여성 혼자 과도하게 부담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불평등하며 이로 인해(이 밖에 이와 유사한 불평등으로 인해) 여성의 약자적 지위가 확인되므로 이 차별을 해소하라는 주장을 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신체와 인격 일체의 정체성을 갖는 다수의 무리보다 소수자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은 우리 사회 평범한 다수처럼 살기 위해서 신체적 훼손을 가해야한다. 법적으로 수술을 해야만 주민번호 뒷자리 2, 4가 주어지고 비로소 인격과 신체가 동일한 성별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주류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이들은 비대칭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 자체로 불평등하다.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의 약자적 지위는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따라서 지성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인간들은 이들이 인간적 존엄을 자연히 누릴 수 있도록 오히려 여러 가지 부가적 혜택을 주어야 마땅하다. 중앙에서 나서서 차별 해소 캠페인이라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혜택은 커녕, 모든 인간이라면 자유로이 누려야 할 직업의 자유, 학습할 권리조차 침해하고 있다. 거기에 스스로를 약자로 정의하는 우리 여성들이 가세했다는 것은 가시지 않는 충격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대놓고 트랜스젠더라는 약자적 삶을 그들 공동체에 공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사실 더 깜깜한 것은 앞으로 부딪혀야 할 혐오와 차별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염려를 본인이 가장 많이 하지 않았을까. 그 두려움이 왜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렌스젠더라는 약자적 삶을 드러내기로 결정한 것은 결국 그 선택지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인간적 공감을, 누구보다 차별적 상황에 있다고 주장해온 우리 여성이야말로 해야하는 것 아닌가. 아직 진보해야 할 길이 너무나 한참 남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참담함으로부터 우리 여성이야말로 도리어 동질감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함께 분노해야하지 않는가.

여성의 권리가 신장 되면 마치 남성의 권리가 깎여나가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끊임 없이 설명해왔다. 여성의 안전이 보장되면, 여성만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더욱 안전한 세상에 살 수 있다고. 여성이 경제적으로 남성과 완전한 대등을 이루는 때가 오면 “집은 남자가 해 와야지.”하는 부당함에 제대로 맞설 수 있다고. 양성이 평등해지는 지점으로 여성 권리가 신장 될수록, 인권 수준이 보편적으로 향상되어 남성들의 삶도 전반적으로 진보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국 남성들이 우리 목표를 지지할 수 있도록 연대의 장을 넓혀가야 하며,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면서 여성 운동은 더 이상 여성들의 이기심이 아닌,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더디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동력은 결국 배제가 아니라 연대인 것이다. 배제는 처음에 논의 자체를 수면 위로 떠올리는 폭발적 힘은 있지만, 결국 고립만 심화할 뿐 효과가 없다.

우리의 목적은 약자로서의 삶을 탈피해 반대로 우월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동등히 고귀한 인격을 가진 인간 사이에 있어서의 진정한 평등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남성과도,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신체적 특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과도 공동의 목표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다시 이번 이슈로 돌아와, 개인적으로 변희수 하사와 숙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A양 사태를 보며 느낀점을 이야기하자면 두가지다. 하나는 수술 후에 소수자 낙인이 더욱 분명해질 것을 알면서도 트랜지션 수술을 결심한 것에 대한, 그 용기를 향한 경외감이다.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 또 정체성에 대한 적극적인 수호 의지로 추앙받아야 할만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 자신의 인격을 존중하는 삶을 살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신체적 훼손을 감수해야만 하는 수술적 방법뿐이라면, 그 선택지를 두고 홀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지나왔겠는가.

나는 이들이, 굳이 수술을 하지 않아도 호르몬 주사를 놓지 않아도. 그러니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라로부터 어렵게 자격을 얻지 않아도 이들의 정체성이 존중받는 사회로 진보하기를 바란다.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영혼 그대로를 인정받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바람이, 인간이라면 성별에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존엄함을 인정받아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선택으로부터 온전히 스스로 자유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염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여성들이 지향하는 세상은 지금의 불평등을 거쳐, 서서히 제도적 도움을 받아, 결국은 아무런 제도 없이도 양성이 당연시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장애인, 성소수자, 다문화 가정의 지향도 같다. 그렇기에 모든 차별적 대우를 받는 약자들은 연대할수록 꿈꾸는 세상에 함께 가까워지는 것이다.

여태 나는, 페미니즘은 그런 정신이라고 생각해왔다. 만일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 이상 여러분과 같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러분이 틀렸으니 조용히 하라고 할 권한이 없을 뿐더러 그럴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이번 사태에 대한 나의 문제 의식은 트랜스젠더 A씨에 대한 혐오가 여성 진영에서 나왔다는 충격 만큼이나, A양에 대한 연대가 이 비극을 막을 만큼 빠르지도 강력하지도 못했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A양의 입학에 반대한 여러분을 어떻게든 내가 정의하는 페미니즘으로부터 배제시키려고 노력할 바에야 차라리 성별도, 신체적 특성에도, 성적 지향에도 구애 받지 않고 그게 누구든 나와 동감하는 사람들과 더 넓고 깊게 연대하겠다. 어디있을지 모르는, 어쩌면 여러분 안에도 있을지 모르는 그들에 닿기위해 그 어떤 곳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향해 끊임 없이 이야기하겠다.

배제가 아닌 연대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기 때문이다.

출처 : 이선영 아나운서 페이스북 

이선영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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