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는 용봉산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인 '홍성상하리미륵불'이 위치한 곳을 봉황(수컷 봉(鳳)은 양(陽)이요, 암컷 황(凰)은 음(陰)에 비유해서 알아보았고, 이번에는 용과 용혈(龍穴)에 대해서 살펴볼까 한다. (龍 : 산의 맥 흐름(氣)이 나타나는 모양, 穴 : 산의 맥 흐름(氣)이 모아서 멈추는 지점, 기혈(氣穴) ; 기자 註)
기자는 풍수에 대한 지식은 매우 부족하기에, 풍수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글로 옮김을 미리 밝혀 둔다.
용봉산은 용의 기운과 봉황의 아름다움을 지닌 산이며, 용꿈을 꾸면 좋은 일이 생기듯이 ‘용하다’는 말은 신기하고 뛰어나다는 뜻으로 “신령스러운 용이 어떤 일을 하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아름다움이란! 아름[私]이라는 개인이 ‘다움(답다)’이라는 이루다, 완성되다, 모범되다 등과의 조화로서 하나 됨을 말하게 되는데 용봉산은 ‘용의 기운이 봉황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을 옛 어른들은 이 산(山)에서 기도를 하면 산[龍]의 기운이 현재의 행복[鳳凰]을 이루어 준다는 의미로서 용봉산이라 불렀다.
용봉산은 충남도청의 주산에 해당한다.
도청은 행정구역상 홍성군 홍북읍과 예산군 삽교읍에 걸쳐있지만 ‘내포 신도시’라 부른다. 내포(內浦)는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으로 우리말로 안-개라 하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는 소금과 생선이 흔해 부자가 많고, 임진, 병자 두 난리가 비껴간 곳으로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라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가야산 동쪽 들판 가운데 큰-개(內浦)인 유궁진(由宮津)은 밀물 때 홍주·덕산·예산·신창과 서울을 연결하는 항로였다고 알려져 있고,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곳으로 평택항을 거쳐 수도권과 연결되는 뱃길의 시작점인 동시에 가야산과 오서산 주변의 10개 고을의 물산과 물살이 거칠어 난파가 잦은 안면도 바깥쪽을 피해 전라도 지역에서 올라오는 귀중품들이 서울(개경)으로 가기 위해 모여들었던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요 출발지였다.
용봉산은 동아시아 최고의 석택리 선사유적지에서 보듯이 소금을 비롯한 풍부한 수산자원, 예당평야의 막대한 농업생산력, 해상교통로서의 경제력(당진으로 들어온 중국 문물이 내륙으로 전해지는 교역로)의 중심에 있었고, 여기에 산이 지니고 있는 신령함이 보태져서 신라의 천년 도읍지인 경주남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불상을 품고 있기에 정치적으로는 비록 변방에 있었지만 문화적 입장에선 결코 변방이라 볼 수 없다.
산 하나를 두고 행정구역에 따라 용봉산과 수암산이라 불리는데, 용봉산이라는 명칭은 홍주목사를 지낸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동악집(東岳集)』과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이계집(耳溪集)』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으며, 1767년에 제작된 「조선팔도지도」에서는 더욱 명확히 나타난다.
이안눌
逢僧江國憶洪都, 龍鳳山光水墨圖, 惆悵十年南又北, 白頭重對八峯無, 師, 洪州人, 住龍鳳寺,
홍양호
湖西錄, 甲申秋, 除洪州牧使, 李上舍遊龍鳳山, 投示松落菴詩, 和而奇之
따라서 일제의 행정개편에 의해 용봉산과 수암산이 나누어졌다는 기존의 견해는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지식으로 용봉산의 용맥(龍脈)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산만으로부터 예당평야를 밀고 들어오는 바다의 기운이 신평리에서 가야산과 부딪치며 불쑥 솟아오르는 곳, 산의 시작점에 높이 5.5m에 달하는 ‘삽교석조보살입상’이 유궁진을 바라보며 서있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었는데, 지팡이를 짚고 중생을 구제하러 헐레벌떡 달려오셨는지? 아니면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빨리 오셔서 보살펴 달라는 중생들의 염원인지? 굳게 다문 듯 잔잔한 미소는 자식을 향하는 어머니를 닮았다.
한편 솟아오른 용(龍)은 곧장 내달아 용봉사 뒤쪽 용바위와 ‘홍성신경리마애여래입상’에 이르러 틀임을 하며 변화무쌍함을 이룬다. 그 변화의 한줄기는 병풍바위를 이루고 구룡대(九龍臺)에서 평지로 들어간다. 다른 한줄기는 곧바로 내달아 ‘하늘의 음악을 적어놓은 듯한 빼어난 경치가 가히 군자의 마음을 빼앗아 욕심을 일으킬 만하다’는 악기봉(樂記峰)을 만들어내고, 한번 더욱더 기세 좋게 틀임하여 노적봉을 지나 최고봉에 이른다. 여기서 또다시 두 줄기로 내리쏟으며 한줄기는 역행하듯 흘러 용방(龍坊 용이 사는 동네)의 뒷산을 이루고 다른 한줄기는 투석봉에서 갈라져 ‘홍성상하리미륵불’과 옛 청송사(태고 보우의 사리탑을 모셨던)에 이른다. 이때 용방으로 향하는 용맥(龍脈)과 투석봉 사이에 큰 계곡이 형성된다. 움푹 빠지며 기운을 끌어당기듯 모으는 계곡의 9부쯤 깎아지른 절벽에 물이 나오는 작은 굴이 용혈(龍穴)을 이루고 좀 더 아래 ‘홍성상하리마애보살입상’을 지나 곧장 달려 내려오며 수직의 용봉폭포를 만든다.
병풍바위 능선 아래로 형성된 계곡 입구를 구룡대라 한다. 구룡대를 들어서서 ‘용봉사 마애불’을 만나고 용봉사를 지나 최고봉으로 이르게 되는데 구룡대를 설명하기 전에 다시한번 ‘용’의 의미를 알아보려고 한다.
용은 진(辰)으로서 별인데, 별이 어머니의 몸으로 들어오면 아이 밸 신(娠)이 되고, 몸 밖으로 나오면 생신(生辰)이 되고, 죽으면 칠성판에 누워 영원한 고향인 별로 돌아간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용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별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구룡대를 절 어귀라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성문을 뜻하는 대(臺)는 절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용이 드나드는 곳이 된다. 하지를 기점으로 점차 낮이 짧아지고 동지를 지나면 낮이 점점 길어지는데, 이에 동양학에서는 정점에 도달하면 곧바로 쇠해짐으로 9를 가장 기운이 성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완성을 추구하는 불교에서는 만수(滿數)인 10을 최고로 친다. 석가모니께서 탄생할 때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켰다는 구룡토수(九龍吐水)의 설화가 있다. 이것은 아홉이 앞으로 완성될 하나를 위해 함께 모였다고 해설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용이며, 별이다. 그래서 구룡대는 아홉 마리의 용들이 마지막 하나를 얻어 완성에 이르고자 하는 중생들을 보살피고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들고나는 입구라는 뜻이 된다. 지금도 구룡대 주변에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이야기가 떠도는 것도 이와 같은 연유라 본다.
옛 문헌에 따르면 현재 용봉천(싸라기내)은 미옥천(米玉川)으로 불렀고, 들판으로 길게 내려온 ‘쥐산’과 용봉사 입구 중간쯤에 위치한 ‘용방치기마을’ 방죽[龍坊築]을 지나 덕산으로 왕래하는 길이 있었다고 한다. 용방축(龍坊築)이라는 용어는 ‘용이 사는 동네의 방죽’이라는 말이고, ‘치기’는 마을 어귀를 일컫는 방언이다. 따라서 ‘용방치기’는 용이 사는 마을의 입구라는 뜻이 된다. 전국에 용과 관련된 용방(龍坊)이라는 동네가 여럿이 있다. 따라서 용방축은 물을 막았던 축대로서 예전 이곳에 용과 관련된 큰 연못이 있었던 것 같다. 용방치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옥천의 상류 방향 마을 중간에 용이 태어났다는 용총샘(龍泉 위쪽 9부쯤에 용혈이 있음)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현재 용방치기사지(寺址)가 남아있고, 주춧돌 등은 당시 사찰의 위용을 가늠케 한다.
지난 호 기사를 읽은 독자분이 고향의 이야기라며, 집안 할아버지뻘이며 현재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주신 풍수의 대가 여산 장지환(일명 장명옥)선생께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리하면 임진왜란 시기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덕산까지 와서 가야산이 남연군 묘소 위 사동리 가는 길(은골, 현신평리)을 거쳐 용봉산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그 맥을 잘랐다고 했다. 택리지가 말하고 있듯 임진왜란 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사 움직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지만 그 의미를 깊게 새겨볼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아래의 이유와 함께 필자의 느낌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가등청정(加藤淸正) : 가토 기요마사, 일본의 유명한 무장(武將).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도와 일본 전국의 통일에 기여했고, 열렬한 불교신자여서 기독교 박해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임진왜란의 2선봉장으로 참전 ; 기자 註)
또한 99암자가 있었다는 용봉산에는 현재 5구의 야외 불상이 남아있고, 도난 1구, 공주 박물관으로 이전 된 1구 등 총 일곱 구의 불상이 확인되고 있고, 산 주변의 들판에 버려진 듯 서있는 4구, 도난 1구 총 5구의 불상이 과거 거대한 사역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쇠락한 용봉사 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용봉사 역시 당시 세도가였던 평양 조 씨가 무덤을 쓰면서 훼철하여 아래로 옮겨지었지만 현재까지 관련된 보물 2점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예전의 영화를 가늠해 보면 독자의 제보가 전혀 신빙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한편 2012년 충남도청의 이전으로 용봉산의 기운은 되살아나고 있다.
여기에 바람을 막고 물은 얻는다는 풍수의 기본인 장풍득수(藏風得水)는 현대 과학이 일정 부분 대처하고 있는데, 콘크리트로 벽을 세워 바람을 막고, 수도를 놓아 물은 얻으니 말이다. 하지만 땅이 가지는 힘과 자연의 순리는 변함이 없다. 어쨌든 내년 2024년 6월 이후 수도권과 1시간 이내로 연결하는 2개의 철도 노선, 제2서해안 고속도로 개통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고, 홍성군 역시 홍성지역에 있는 4구의 불상과 최영 장군 활터, 용혈(龍穴)을 잊는 둘레 길을 조성한다고 하니 용봉산의 옛 위용을 되찾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필자의 이 글도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용봉산 자락에 위치한 옛 절터를 발견하고, 지역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님이 계셔서 본 기자의 마음에 뿌듯함을 느끼게 된 것은 또 다른 수확이었다.
송승희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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