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연구실에서 연구에 전념하던 나는 1966년, 정치학과 교수인 민병대 학장으로부터 학생과장 임명 통고를 받았다. 당시 문학부 학생이 주도하는 반정부, 민주화 쟁취 등 구호를 외치며 벌어지는 시위로 연일 학내가 소란하였다. 관례로 문학부 교수가 학생과장직을 맡아 왔다. 그런데 학장은 이학부 교수인 나를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학장실에서 2시간 동안 학생과장직을 맡을 수 없다고 버텼지만 이미 발령이 난 뒤여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문, 사회과학대학 교수와 접촉한 일도 없었고 더더욱 당시 학장인 민병대 교수를 만난 일은 전혀 없었다. 실험실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나를 학생과장으로 임영한 것이다.
누가 나를 추천하였는지 아직도 모른다. 앞의 학생과장은 누구라 할 것 없이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나도 그릴 것이라고 에상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임기 2년을 채웠다. 대학본부는 나를 풀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운동권 학생들이 외쳐대는 과격한 구호를 무디게 하고, 2시간 끌 시위를 1시간에 끝내도록 그리고 가능하면 강의실 혹은 도서관을 점거한 철아 농성을 자제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들은 가끔 나의 그 같은 부탁을 들이 주었다. 그 대신 나는 철저히 학생을 보호하였다. 형사가 수색 중인 학생을 숨기거나 혹은 집으로 데리고 가 하루 재위 보내기도 하였다. 결국 살벌한 학내 분위기는 많이 풀렸다. 그러니 대학이 나를 풀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고 학생들도 나의 학생과장 연임을 바라고 있었다.
국문학과 전광용 교수는 "양쪽이 조 교수의 학생과장직 연임을 바라니 그는 성인인가, 군자인가, 놀랍다."고 평한 일이 있다. 원래 나는 선거, 피선거권이 있는 대학생은 당연히 정부에 대하여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의 학생운동 주동자들은 오늘날 각계 원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손학규, 유인태 등 원로 정치인이 있고, 김종섭, 이경형 등 현재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회장, 부회장이 있다.
나의 지도로 석, 박사학위를 취득한 제자들이 나의 호를 딴 '설랑(雪浪)동문회'를 조직한 것이 거의 40년이 된다. 그동안 이들은 매년 연초, 5월의 '스승의 날’ 그리고 8월 여름에 각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동문과 그의 제자들 약 100명이 모여서 1년간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등 학술교류 행사 등으로 이틀을 보낸다. 제자들이 꾸민 '설랑동문회‘ 처럼 연례행사로 발전한 연구실 모임은 흔치 않다. 나의 사후에도 이 모임이 계속 지속되고, 끝내 국제적 '설랑 발생생물학모임’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1970년 WHO의 연구비 지원을 받게 되어, 두번째 외국 연구기관에서 연구활동을 하게 된다.
처음 4개월은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 보건대학에서, 11개월은 보스턴의 하바드 대학 생식생물학연구소에서, 그리고 나머지 9개월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생리학연구실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였다. 주로 생쥐 난자의 성숙유도 및 억제와 관련된 연구에 몰두하였다. 통상적인 배양법은 배양접시 내에 장치된 배양액 내에 주입된 난자를 37도 정온기 내에서 배양하며 상태를 관찰하기 위하여 수시로 배양접시를 정온기 내에서 꺼내 현미경으로 관찰한다. 그때마다 접시 안에 가득 채운 파라핀 오일이 흘러 내리고, 서로 다른 처리를 한 난자 배양액이 섞이는 경우가 발생하여 연구원의 에를 태우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세관 내 난자 배양법, Microtube culture method for mouse oocyte'를 개발하였다. 직경 1mm, 길이 5Cm의 유리 미세관을 난자 배양장소로 이용한 것이다. 유리관 중앙에 1Cm 가량 주입한 배양액 내에 미세관으로 배양할 난자를 넣고 유리관 양쪽 끝은 2mm 정도 파라핀 오일로 마개를 하고 정온기에 넣어 배양한다. 유리관이 땅에 떨어서 깨지지 않는 한 난자들은 계속 성숙과정을 진행한다. 나는 유리관 가운데 배양액에 주입한 미성숙 난자 혹은 초기배아의 성숙과정을 관찰하였다.
나는 미성숙 난자와 분화가 진행 중인 초기 배아가 들어 있는 미세관을 시험관 내에 고정한 후, 온도 37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 시험관을 솜으로 몇 겹 싸고 내 몸에 묶은 채, 케임브리지로 가서 걷고, 기차 타고, 버스를 타며 에던버러 대학의 친구 연구실을 찾아, 그곳에서 미세관 내 난자와 성숙과정 중의 배아 상태를 확인하였다.
난자는 성숙과정을 진행하고 있었고, 초기 배아는 이미 포배까지 분화하고 있었다. 물론 이를 본 나의 친구는 감탄하였다. 한때 미국의 발생학 교과서에 'Cho's microtube culture method for mouse oocyte'를 소개한 일이 있었다.
1974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1년 전, 신임 이해영 학장이 밤늦게 전화로 나를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직을 맡기기로 하였고, 외국 출장 중인 10일간 학장직무대리를 맡으라고 통고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연히 선배교수가 맡아야 할 자리를 까마득한 후배가 맡게 된 것이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이 학장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김포공항으로 떠났다. 물론 나의 이학부장 임명에 선배교수, 원로교수가 불만이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어쩔 수 없이 이학부장이 된 나는 본부 승인 후, 1년 뒤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발족할 자연과학대학의 기초과학 교육 및 연구 수행에 소요될 재원 마련을 위하여, 미국 대사관 AID 담당관 Nable 박사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AID 차관금 획득관련 협의를 한 끝에 5백만 달러의 차관금 획득에 성공하였다. '10년 거치, 40년 상환, 연 이자 30%'의조 건이었다.
일부 교수는 전액을 연구용 기자재 구입에 투입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나는 차관금 중 250만 달러를 80명의 이학부 교수가 1년 혹은 1년 반 미국의 대학 또는 연구기관에서 체류하는 동안 소요되는 재원으로 배정하였고 나머지 250만 달러는 미국 연구기관에서 사용한 연구용 기자재 구입에 필요한 재원으로 지원하였다.
교수들은 귀국 후에도 같은 주제의 연구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학부 교수의 연구역량은 일시에 국제수준으로 신장하였다. 정부가 지원한 차관사업 중 이학부 차관사업이 가장 성공한 예로 기록되고 있다.
1975년 2월 말, 부산 출장 중인 나는 뜻밖에 내가 새로 발족한 자연과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신문으로 보고 알았다. 관례로 학장은 원로교수가 맡아왔다. 그런 자리를 제자인 내가 맡게 되었으니 학내 분위기가 어떠 했을까는 불문가지이다. 본인의 뜻을 묻지도 않고 마구 학장 발령을 낸 총장에게 나는 임명 철회를 강하게 요구하였다.
연유인 즉, 총장은 당시 나를 찾았다고 하였다.
1975년 2월 28일 오후 6시, 정부가 최종적으로 문리과대학을 인문대,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의 3개 대학으로의 분리를 승인하였고 다음 날 3월 1일부터 새로운 체제의 대학으로 출범하게 되어서, 즉시 학장을 임명하여아 했으며 결국 나를 학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학장으로 취임한 나는 대학 개혁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학과장인 원로교수가 신임교수를 추천, 임명하여 온 관례를 바꾸어 교수의 공개모집 제도를 도입하였다. 총장으로부터 얻은 30명의 교수 채용을 위하여 전문학술지와 신문 등 매체에 교수모집 광고를 냈다. 미국 등 명문대학교 학위 취득자 70여명이 공모에 응하였다. 그 중 인사위원회에서 천거한 30명 후보자를 교수로 임명하였다.
한 일 가운데 또 한가지는 '자연과학종합연구소'를 개설한 것이다.
이 연구소 연구비 지원을 위하여 당시 문교부 대학국 이대순 국장을 만났다. 나는 2억 원의 연구비 지원을 요구했지만 이 국장은 오히려 연구비 지원액을 6억 원으로 결정하였다.
나는 이 연구소 연구수행에 다른 대학교수와의 공동연구를 권장하였다. 또한 그동안 교수 개개인이 관리하여 오던 연구비를 중양관리제도로 바꾸었다. 이에 불만인 교수도 있었으나 결국 나의 설득을 받아 들였다. 연구비 총액 중 일정액의 통장을 교수에게 교부하고 연구비 사용 영수증 제출에 따라 사용액수를 교수의 통장에 이체함으로서, 연구비 사용에 따른 시비를 불식하였다. 이로서 서울대학교 사인과학대학의 교육 및 연구 역량은 일시에 국제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 같은 자연과학대학 개혁이 다른 단과대학으로파 급되있고, 끝내 국내 여러 공,사립 대학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80년 총장으로 부임한 고병익 교수가 나를 부총장으로 임명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부총장직은 본직이어서 교수직 사표를 내아 했다. 정년까지 아직도 10여 년이 남은 터에 2년 짜리, 잘 하면 4년의 부총장직 수행 후, 실직자가 될 부총장 임명을 받아 드릴 수는 없었다.
앞의 부총장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그들은 총장직을 승계하거나 혹은 지방 국립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행이었고, 그리 되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박상현 장관에게 부총장직도 학장직처럼 보직으로 바꾸라고 건의하였다. 박 장관은 나의 건의를 수용하고 서울대학교 부총장직을 보직으로 하는 교육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 국무회의는 이를 가결하고 바로 이 법을 국회로 송부하였다.
그러나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태로 국회는 교육법 개정(안)을 계류한 채 해산하였다. 다음 해 3월, 전두환 장군이 부상하며 대학생의 반대 시위가 극렬해 심에 따라 학생지도와 관련, 책임을 지고 고병익 총장과 부총장인 나는 사표를 냈다. 결국 나는 실직자가 된 것이다. 2개월 후, 새로 부임한 권이혁 총장의 배려로 나는 다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있다. 나는 두번째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다. < (3)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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