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칼럼] 법원을 떠나며 남긴 글

변호사 유해용 법률사무소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데스크 승인 2020.02.02 16:14 | 최종 수정 2020.02.02 18:42 의견 0

또 다시 인사철이 돌아왔습니다. 저 자신도 법원을 떠난 마당이지만, 선후배 또는 동료였던 분들이 법원을 떠난다는 소식은 까닭 모를 안타까움과 애석함으로 다가옵니다.
제게는 전직 법관이란 타이틀이 평생 가장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명예이자 훈장입니다.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흘러 지금은 색이 바란 사진처럼 되었지만, 그때의 추억을 소환하여 법원을 떠나면서 법원 내부 게시판에 남겼던 퇴직인사 글을 여기에 다시 적어봅니다.

[법원을 떠나며]
이제까지 제가 정말 생명처럼 사랑했던 법원과 판사의 자리를 떠나려 하니, 만감이 교차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습니다. 떠나는 이 순간 문득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으니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정확히 25년, 사반세기를 법원에서 보냈습니다. 지금은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럽지만 처음 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제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부자의 돈지갑과 권력을 가진 자의 칼 앞에서나, 가난한 사람의 한숨과 눈물 앞에서나 똑같이 공평한 법관이 되겠노라는 꿈이었습니다.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지혜, 진실을 끝까지 찾아내는 성실함과 인내심, 당사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열린 마음과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 시류에 편승하거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곧은 기개, 양심의 명령에 따를 수 있는 용기, 남의 아픔과 고통을 안타까워 할 줄 아는 따뜻한 인간애를 골고루 갖춘 멋진 판사가 되어, 좋은 재판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떠나는 이 순간에 돌아보니 제가 꿈꾸던 판사가 되기는커녕 역사에 남을 판결은 고사하고, 국민과 법원을 위한 의미 있는 기여조차 한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아서 아쉬움과 후회만 가득합니다.
제가 사직을 결심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판단자로서 공정하고 올바른 재판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갈수록 심해지는 반면, 법정에서 재판을 진행하는 것도, 결론을 내는 것도 점점 어렵게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작년 이후 우리 법원 안에서 일어났던 난생 처음 겪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저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정도로 고민과 갈등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선배께서 판사란 모름지기 투명한 유리잔과 같아서 조금만 흠이 생겨도 국민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고 강조하신 적이 있는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공정한 판단자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하기에는 제가 너무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제가 처한 경제적인 문제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결국 더 이상 법복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법원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아무튼 제가 그동안 법원에 쏟은 노력과 정성에 비해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과 혜택만 누리고 떠나가는 것 같아서 참 송구스런 마음입니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재판을 통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저의 법관으로서의 꿈은 오늘 여기서 멈추게 되었지만, 법원가족 모두의 정성과 노력이 하나로 뭉쳐져 국민이 진정으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자랑스러운 사법부로 굳건히 서가기를 멀리서나마 간절히 염원하고 응원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때로는 제대로 항변할 기회조차 없이 억울하게 거센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더라도, 진실은 가려져야 하고 정의는 세워져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오늘도 밤늦은 시간까지 묵묵히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계신 수많은 법원가족들에게 이 기회를 빌려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법조인으로서의 진정한 평가는 변호사로 변신한 후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보고 결정된다는 말을 예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탐욕에 눈멀지 않고, ‘품위 있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보고파 하는 그 마음을 그리움이라 하면, 잊고자 하는 그 마음은 사랑이라 말하리. 두 눈을 감고 생각하면 지난날은 꿈만 같고…세상에 다시 태어나 사랑이 찾아오면, 가슴을 닫고 돌아서 오던 길로 가리라.(흘러간 유행가 가사 중에서)]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8. 2. 8. 유해용 올림

출처 : 유해용 변호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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