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칼럼] 슬기로운 변호사생활

'재판부가 한두 시간 정도 당사자를 대면하여 억울한 부분을 들어주고 충분히 대화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사자가 재판에 승복하는 것이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데스크 승인 2020.06.28 09:56 의견 0

변호사로 변신한지 어느덧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6월 한 달은 제가 맡았던 소송의 승패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습니다. 다른 분들이 페북에 잇따른 승소 소식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승소하거나 무죄를 받아낸 사건도 있기는 하지만, 패소의 아픔과 좌절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고 오래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의뢰인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렸다는 미안함,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재판의 결과나 이유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을 때입니다.

의뢰인 복이 많아서인지 다행히 아직까지는 원하는 결과를 받아들지 못했더라도 항의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최선을 다한 것을 잘 알기에 감사하다거나 변호사님의 명성에 금이 가게 해서 미안하다는 뜻밖의 민망한 인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이 위안이 되기보다는, 변호사는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현실이 더욱 무겁게, 아프게 다가올 뿐입니다.

주변의 변호사 선배들로부터 의뢰인과의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충고를 여러 번 받았지만, 자꾸 감정이입이 되어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형사사건에서 제가 보기에 분명히 억울한 부분이 있거나 형이 과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마치 제가 유죄를 선고받거나 형을 사는 것 같은 참담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변호사는 어쩔 수 없이 한쪽 편만을 대변하기 때문에, 또 의뢰인과 일심동체가 되면서 객관적인 판단력이 흐려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재판시스템의 구조적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 대부업체와의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어떤 여성 의뢰인은 결과를 접하고 너무도 억울하여 며칠을 앓아 누었다고 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뒤늦게라도 판결한 판사님께 저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호소하는 편지라도 보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건의 절대적 진실을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만약 변호사가 의뢰인과 상담하는 것처럼, 재판부가 재판절차에서 한두 시간 정도 당사자를 대면하여 억울한 부분을 들어주고 충분히 대화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판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고, 적어도 당사자가 재판에 승복하는 것이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어느 세미나 자리에서 법원 고위직을 지낸 법조원로께서 사건의 실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판사가 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당사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재판의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판사는 늘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성찰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변호사를 해보니 이 말에 더욱 공감이 가고, 법관은 단편적인 정보를 기초로 너무 쉽게, 과감하게 남의 인생에 대해, 한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 단정해 버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재미있게 보면서 변호사라는 직업과 대비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는 ‘병원에 가는 판사’라는 제목의 글을 법원회보에 기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 글의 일부입니다.

“병원을 찾는 사람이나 법원을 찾는 사람이나 곤궁하고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의사의 치료가 육체적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면, 재판, 특히 형사재판은 사회적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은 흔히 가운을 입고 일을 하는 세 가지 직업(성직자, 의사, 판사)을 함께 놓고 비교하여 말하곤 한다. 이들 직업이 갖는 사회적 책임과 업무의 공익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런 사람들의 부정과 비리, 실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남의 정신과 영혼을 어루만지는 성직자, 생명을 다루는 의사, 세상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남을 심판하는 판사에게 고도의 공익성, 청렴성과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익적 기대가 어긋났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격한 배반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이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물질주의와 이기심이 팽배하고 탁류가 휩쓰는 세상일지라도 누군가는 양심과 정의와 숭고한 인간정신의 수호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 때문일 것이리라.”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등장하는 친절하고 선량하고 직업윤리에 투철한 의사를 찾기가 쉽지 않는데도, 우리가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 이유는 그만큼 이런 이상적인 의사를 갈망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변호사가 의사와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의뢰인을 살릴 수 없고, 반드시 판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비즈니스 마인드나 수완이 턱없이 부족하여 시행착오를 거듭하지만, ‘품위 있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꼭 지키고 싶습니다. 반복된 실패의 흔적이 쓰라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를 믿어주고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의뢰인을 위해 함께 울어주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렇더라도 이왕이면 단지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비를 멈추어 줄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변호사가 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출처: 유해용 변호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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