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완규 회고 연재칼럼]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받고(3)

서울대 총장 임명과 총장시절 총장실 학생 점거

데스크 승인 2024.12.08 00:00 의견 0

그리고 얼마 후인 1987년 8월 나는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제자와 여름휴가 겸 학술행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서명원 교육부장관이 나를 찾는다고 하였다. 다음 날 장관실을 찾은 나에게 장관은 대뜸 '총장을 맡으라'며 임명장을 주었다. 그때 나는 "임명총장은 내가 끝이며, 다음부터는 총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에서 추천한 후보자를 총장으로 임명하여아한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나의 후임은 총장추천위원회를 거쳐서 임명되있다.

총장으로 취임한 후 10일도 되기 전, 오후 9시경 대학 하두봉 부총장의 전화를 받았다.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대부분 수감 중인 학생들의 자모들)이 대학본부 건물 유리창 반을 깼다는 것이다. 이들이 남이섬에서 단합집회를 열고 저녁 7시 경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서 농성 중인 학생을 위문한다며 대학 정문에 도작하였지만 대학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이를 열라는 민가협 아주머니와 정문 수위 사이에 실랑이가 붙었다. 그런 가운데 수위가 민가협 아주머니 뺨을 쳤다며, 그들은 당장 총장이 나와 사과하고 수위를 파면하라며 본부 유리창 반을 부순 것이다. 총장을 만날 수 없을 경우, 다음 날 남은 유리창을 모두 깨겠다며 밤 12시 경 해산하였다는 것이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1987년 6월 29일 민주화 선언으로 제명되있던 학생들을 모두 복학시키기로 하였다. 복학 대상자들은 바로 ’전국청년학생구속자협의회‘를 조직하고 저들이 준비한 복학원서를 제출하겠다고 우기며 본부건물 내에서 연일 농성하고 있었다. 이에 민가협 아주머니들도 가세하며 총상 면담을 요구하였다.

나는 이들 민가협 아주머니들과 만날 생각으로 이들을 교수회관 강당에 모으라고 하였다. 민병수 학생처장은 저희들이 처리할 것이니 총장은 지켜만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총장 면담을 요구하고 있어서 내가 나서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교수회관에는 30명의 아주머니와 60여 명의 복학 대상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먼저 그들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만큼 분위기가 매우 살벌하였다. 나는 먼저 자녀가 감옥에 갇혀있는 아주머니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엊그제 총장이 되어 대학 현황을 파악하지 못한 체, 이 자리에 나왔다며 하실 말씀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 때 한 학부모가 그날 신문의 컬럼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컬럼에는 학부모가 아침 등교하는 아들에게 데모에 절대 참여하지 말라고 일렀으나 결국 경찰 유치장에 갇혔다며 교수를 원망하고 매도하였다. 교수를 만나려고 해도 만나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교수는 원래 약한 사람이다. 이 분들은 자신의 전공분아에서 업적을 축적하여 세계적인 학자가 되기를 바라며, 또한 제자를 가르쳐 학자로 양성하는 것을 본분으로 알고 있다. 대학 본부의 유리창이 박살 나도, 대자보에 문제의 글이 실려도 언제, 어째서 누가 그러했는가를 알지 못하며 또 알려 하지 않는다. 또한 시위하다 경찰 곤봉에 맞아 이마에서 피 흘리며 끌려가는 제자를 보면서도 경찰 앞에 막아 설 용기도 없다. 오늘 우리가 교수회관에 모인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대학의 본질이다. 총장이 된 후 나를 위기관리 총장. 혹은 소방수 총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겠지만,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는 책임을 다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나의 설명에 학부모는 공감하는 듯 하였다. 아주머니 가운데 한 분이 나를 ’민주총장'이 되도록 돕자고 제안하였고 모두 박수로 응해주었다. 나는 의외의 사태에 아연할 뿐이었다. 같이 동석했던 복학생 대표는 그들이 준비한 복학신청서가 아니라 대학에서 발부한 복학원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시초 살벌하였던 모임이 화기 찬 모임으로 바꾸어 진 것이다. 처음 경직된 분위기여서 회의가 끝난 후 그 자리에서 온전하게 나올 수 있을가 걱정하였으나, 그들의 박수를 받으며 회의장을 떠났다. 본부 앞에서 연좌농성 중인 4천명 학생도 해산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도서관을 점거하여 철아농성 중인 학생도 모두 철수하였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여러 교수들이 성실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인하였다.
어찌 되었던 총장 취임 10일도 되기 전의 일이었다. 다른 모든 교수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학부모와의 대화가 있은 후, 나는 학생회 간부를 만나기로 하였다. 당시의 학생회장인 이남주 군이 구속된 뒤여서 학생회 분위기는 매우 냉냉하였다. 특히 복학 이전의 박 모군이 학생회장으로 입후보 하였다. 나는 박 군의 복학 수속을 끝내게 하였고, 결국 박 군이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있다.

나는 당시의 학생회 간부를 모두 총장실로 불러 들였다.
총장실로 들어 올 때, 그들의 적대시하는 듯한 눈초리를 보면서 사제지간의 불신의 벽이 얼마나 두꺼웠던가를 절감하였다. 나는 박 군의 손을 잡으며 “너희들이 치른 그 간의 고통은 남이 하지 못한 소중한 경험이다. 그 경험이 성장하는 데 밑씨앗이 될 것이다.”라며 위로 반, 격려 반의 말을 하였다. 학생들의 눈 빛은 곧 환하게 풀어졌고 제자의 자리로 되돌아 왔다.

학생회장은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교수 조 아무개와 학생 박 아무개는 아무 때나 쉽게 어울릴 수 있으나, 일단 총장이고 학생회장이면 절차를 밝아야 한다. 만날 일이 있으면 학생처장을 통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총장실 벽은 결코 높지 않다.”고 일렀다.

그렇게 무섭게 뛰던 사자들이 선생 앞에서 순한 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이렇게 학생회장과의 대화는 매우 생산적이었다. < (4)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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