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으로 취임 후 1,300여명 의 학생이 제명된 것을 알았다.
민주화 쟁취 시위를 하다 경찰에 잡힌 학생 이름이 대학본부에 통보되면 학칙에 규정된 '정치활동금지' 조항의 위반 이유로 총장이 서명하고, 그러면 학생들 자신도, 지도교수도 모르는 사이 제명된 것이다.
나는 대학 처, 실장 등 임원과 협의한 후, 학칙 중 학생의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학생징계권을 총장으로부터 단과대학 교수회의로 이관하는 학칙 개정안을 마련하였고 교육부 승인을 요청 하였다. 교육부는 3개월이 지나도 서울대학교의 개정 학칙을 승인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개정 학칙을 승인할 경우 대학은 학생 시위로 더 혼란해지고, 이 같은 혼란이 전국 대학으로 퍼져 나가, 나라 전체가 혼돈 상태로 빠져들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 그 이유다.
나는 3개월이 지나도 개정 학칙 승인이 없을 경우, 총장직을 사퇴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당시의 서명원 교육부장관은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최초로 교수가 마련한 자율학칙을 존중하며 이의 승인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음 장관에게 넘길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재가하고 장관직을 물러날 것이라며 개정학칙 승인 날인 후 바로 장관직을 사직하였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대학은 조용하였다. 단과대학 교수회의가 학생징계권을 행사하기로 한 제도에 학생들은 굴복한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교무처장이 관리하는 교수 연구지원을 위한 학술연구진흥재단과 학생처장이 관리하는 학생장학재단이 있었다. 이들 기금을 은행에 예치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이자로 교수 연구지원 및 장학 사업을 시행하고 있었다. 나는 두 기금재단을 하나로 합친 '서울대학교발 전기금재단'으로 개편하였고,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를 재단의 상임이사로 위촉하였다. 조동성 교수는 기금 확장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고 발전기금의 규모가 기대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나도 2006년 인촌상위원회가 수여한 ’상금5천만원'을 발전기금재단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그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기금재단에 매월 일정액의 후원금을 기부하고 있다.
총장 재임 중 세계 여러 명문대학 총장들이 서울대학교를 찾아 학술 교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나는 즉시 이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서울대학교 초빙교수의 숙박시설이 없었고, 둘째는 도서관 운영 체제가 단지 장서 보관 역할을 할 뿐, 교수들 조차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폐쇄적이었고, 셋째는 분야가 다른 교수들 사이의 교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같은 약점의 개선 없이 세계 명문대학과의 교류는 오히려 서울대학교의 약점을 노출시킬 뿐이었다.
나는 이같은 문제점 해결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우선 나는 삼성 이건희 회장 측과 협의를 하였다. 삼성 측은 1990년 3월, 이병철 초대회장의 아호인 '호암(湖巖')을 딴 '호암교수회관' 명의의 단기간 및 장기간 숙박용 객실 각각 100개의 시설과 이들의 식사 및 회의를 위한 건물 3개 동을 건립하여 대학측에 기증하였다. 호암교수회관 시설은 거의 신라호텔 수준이며 삼성 측은 신라호텔 지배인을 파견하여 2년간 회관의 합리적 관리의 기틀을 다지도록 도왔다. 호암에서 숙박했던 외국인 교수는 호암교수회관을 선호하며 2개월 전에 예약하여아 할 만큼, 이제는 호암교수회관이 서울대학교 명물로 자리 잡았다.
나의 임기가 끝날 무렵 청와대는 '한화가 경향신문 인수 대가로 헌납한 280억 원을 총장인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이를 중앙도서관 운영체재 개선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전국 국립대학교 도서관협의체를 구성하였고 각 구도서관 자료의 교류, 열람체제구축 등 도서관 운영 체제 개선에 투입하였다.
1년 혹은 1년 반 후 사퇴하였던 이전의 총장과는 달리 나는 조용한 학내 분위기에서 4년의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대학의 원활한 운영은 나 혼자 만으로 이룬 것은 아니다. 부총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기획처장등 대학 보직교수의 헌신적 협력과 봉사가 있어 가능하였다.
1991년 총장직을 마친 나는 정년까지 1년 반이 남아 있어서 교수직으로 복귀 할 생각이 없었다. 8월 중순 총장직을 끝난 바로 다음 날, 나는 중국 연길에서 열리는 '한민족국제학술회의'에 기조강연을 하도록 되어 있어서 출국하였다. 10일 간 체류 후 귀국한 나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당시의 학장이던 권숙일 교수의 배려로 여러 동료 교수들이 분담하여 나의 교수직 신규발령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정년 1년 반을 남긴 내가 세번째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다. 나처럼 서울대학교 교 수직을 세 차례나 발령받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나를 생각하는 동료 교수들의 따뜻한 마음씨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1991년 총장직 사퇴 후 30여 년이 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보직교수들이 '4층회' 이름으로 1년에 두세 번 모여 두터운 우의를 다지고 있다. 다만 전기 2년 부총장을 역임한 영문학과 김종운 교수와 후기 2년 부총장을 역임한 김영국 교수가 보직 되임 후 4, 5년 사이에 타계 하였고, 또한 어려울 때 학생처장직으로 총장을 보좌하였던 민병수 교수도 2015년 79세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나의 총장 임기동안 헌신한 두 분 부총장과 민병수 학생처장의 명운을 빌 뿐이다.
특히 민 학생처장의 처장으로서 학생지도에 남달랐던 일이 떠 오른다. 1988년 8월 학생회장 등 간부가 대학에 여름농촌활동 보조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민 처장은 대학에 예산이 없으니 학생회의 운영비로 충당하라고 일렀다. 학생회는 그 자리에서 총장실로 난입, 총장실 기물을 모두 밖으로 내동댕이 치고 총장실 벽에는 붉은 페인트로 총장 및 대학을 비난하는 글로 가득 찼다.
난동을 말리는 교수를, 특히 여교수를 발로 걷어 찼다. 이런 난동을 당한 교수들이 학생회 간부 10여 명을 제명처분 하였다.
이 같은 일이 내가 호주 시드니, 멜버른의 대학을 방문하는 등 외유 중에 일어났다. 이 사건을 알게 된 나는 중도에서 급거 귀국하였다. 총장실 상황은 바로 목불인견이었다. 신문, 방송이 연일 서울대학교 사태를 보도하였다. 이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나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서울대학교 개교이래 교수가 직접 제명 등 학생을 중징게 처분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제명처분이 심한 것 같아 무기정학 처분을 바랬지만 총장의 권유를 받아드릴 수 없을 만큼 교수의 분노는 컸다. 대학 소요의 책임을 지고 바로 교육부에 총장직 사표를 냈다. 그러나 사표는 바로 반송되어, 어쩔 수 없이 총장직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끝까지 학생처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한 민 처장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2015년 타계 후 '4층회‘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 외에 '4층회' 때마다 참가하는 교무처장 이현구 교수, 기획실장 김경동 교수 및 정영일 교수, 연구처장 서정헌 교수, 서울대학교 발전기금 상임이사 조동성 교수, 그리고 권순국 교수, 김인준 교수, 이상익 교수, 이태수 교수, 조수헌 교수 등이 각종 보직을 맡아 각자 진심어린 봉사가 있었기에 나는 영예롭게 총장 4년 임기를 채울 수 있었다. 그저 이들의 봉사가 고마울 뿐이다. < (5)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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