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완규 회고 연재칼럼]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받고(5)

교육부 장관 임명과 퇴임
인천대학교 개혁

데스크 승인 2024.12.15 00:00 의견 0

교수직으로 복직한 바로 뒤, 내가 교육부장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1992년 1월, 정해창 청와대 비서실장의 전화를 받은 나는 장관 임명을 사절할 뜻을 밝혔다. 전화로 20여 분 '받으라', '싫다'의 언쟁이 있었고, 끝에 비서실장은 강한 어조로 “오후 4시에 보도 나갈 것이니 그리 알라.”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발령 받기 위하여 청와대로 갔다. 노태우 대통령은 '교육부 장관 임명사절' 이유를 물었다. “대통령 임기가 13개월 남은 때여서, 공무원이 앞으로 며칠 남았는가 손가락 꽂고 다음 정부 오기를 기다릴 터인데, 교육부 장관으로 아무런 도움을 드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대통령은 “같이 고생합시다.” 라며 나를 격려하였다. 장관 싫다는 사람을 임명하는 노태우 대통령의 포용력에 감탄하였다.

1992년 3월 초, 교육부 장관이 전국 대학교 총장에게 학생지도를 철저히 하라고 훈시를 내렸다는 기사가 일간지 1면을 덮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알아 본 즉, 대학국장이 학기 초에 장관명의의 훈시를 보내는 것이 관례라고 하였다. 장관과의 사전협의 없이 장관 명의로 된 훈시를 보낸 것이다.

나는 매우 불쾌하였다. 장관 취임사에서 대학의 자율적 운영을 강조하였던 내 이름으로 총장에게 엉뚱한 훈시를 보낸 것이다. 당시의 대학국장은 대학에서 근무해 본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공무원이 대학을 통제하는 업무를 다루고 있어서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1년간 대학교 사무국장으로 근무한 후 다시 교육부 본부로 복귀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대학국장을 지방의 한 국립대학교 사무국장직으로 내려 보냈다. 그는 이를 좌천으로 판단, 그 충격으로 암이 발생, 끝내 1년간 고생하다가 타계하였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교육부 공무원의 기강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던 중 인천 시민이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백인엽 장군에 대한 처리를 요구한 것이다. 그 동안 백인엽 장군이 인천 시내에 걸립한 인천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이 14개가 된다. 통상적이면 육영사업에 헌신한 공으로 인천 시내 곳곳에 송덕비가 서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백 장군은 원망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교육기관 건립 구실로 인천 시내 곳곳 부지를 징발하거나 부지를 싼 값으로 몰수하였다고 한다.

인천대학교 선인재단 이사장이 전 교육부 차관이어서 인천대학교 문제점이 있더라도 교육부가 눈감아 준다며 인천 시민의 불평이 컸다. 나는 곧 교육부 감사를 파견하여 인천대학교 재단의 감사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10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나는 이사장에게 이 문제를 1개월 안에 해결하라고 지시하였고,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사진 전원을 해임할 것이라고 통고하였다. 물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나는 바로 이사진 모두 해임 조치를 하였다.

학교선인재단기금 150억원 가운데 반인 75억원을 백인엽 설립자에게 주고, 이 대학의 관리를 인천시에 넘겼다. 이런 조치를 그대로 받아 들인 백인엽 장군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가 불복하고 소송을 제기한다면 대법원까기 끝고 갈 수 있었고 대학 문제 해결은 더욱 힘들고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결국 백인엽 장군의 승복으로 인천대학교는 인천시립대학이 된 것이다.

나는 사전에 청와대 의견을 듣지 않고 인천대학교 문제를 처리한 책임을 지고 바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장관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으로 청와대 대통령실을 찾았다. 그런데 의외로 노 대통령은 인천대학교 처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였고 나에 대한 노고를 치하 하였다. 인천대학교는 그 뒤 캠퍼스를 송도로 옮겼고, 조동성 교수 그리고 박호군 장관 등이 총장으로 부임하여 인천대학교 개혁에 노력하였다. 끝내 인천대학교는 국립대학교로 승격하였다. 송도에 조성된 인천대학교의 새로운 캠퍼스는 인천을 대표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다.

교육부 장관의 임기가 끝날 무렵 장관 등 교육부 공무원이 국회 교육체육청소년위원회에 불 려나가 하루 종일 국회의원에게 시달렸다.

끝날 무렵, 조순형 위원장은 나의 대학 교수 때 특히 총장 때의 일, 그리고 장관 때, 각 대학의 자율화 정책과 관련한 나의 노력과 관련하여 분에 넘치는 칭송의 말로 분과위원회를 마무리 하였다. 일부 동석했던 교육부 관료는 조 위원장의 나에 대한 칭송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의례히 정부 관료들은 국회의원의 거친 질타의 발언에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 통례이지만 이번 일은 참으로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한 달 뒤 조순형 위원은 나를 전경련으로 초청하여 그 때의 자신의 발언 내용을 붓으로 적은 액자를 ’가보‘로 보관하라며 나에게 주었다.

1993년 2월 말 장관직 끝날 때가 교수직 정년과 일치하여 결국 이 때 모든 공직을 끝냈다. <(6)계속>

저작권자 ⓒ 한국시민프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는 출처 표기 시